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에다 마스오 (문단 편집) == 경력 == [[니혼대학]] 예술학부 영화학과 출신. 영화 시나리오 라이터를 꿈꿨지만 자신은 글쓰는 재주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현장에서 뭐라도 하는 게 더 체질에 맞아 재학 중에도 영화 업계에서 계속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1970년대의 일본 영화계는 사정이 안 좋아서 자신을 정식으로 취업 시켜주는 곳이 없었고 대신 애니메이션을 해보라는 학교 측의 권유로 [[선라이즈(브랜드)|선라이즈]]에 입사했다. 1979년 입사 하고 바로 급하다며 [[기동전사 건담]]의 [[제작진행]]으로 투입되었다. 안 그래도 성격이 독한 [[토미노 요시유키]] 감독 작품이었고 중간에 스케줄이 꼬여 매우 힘들었지만 이때의 경험과 인맥이 자신의 프로듀서 경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너무 힘든 일이라 기동전사 건담 제작진행 중 1년 뒤에도 회사에 남은 건 자신 밖에 없다고 한다. 우에다 말로는 작화감독 [[야스히코 요시카즈]]가 밑그림을 다 깔아주는 제작 방식이라 야스히코가 있어야 작업이 되는데 야스히코가 건담과 [[우주전함 야마토 시리즈]]와 동시에 작업해서 일을 미루기도 하고 나중엔 과로로 병원에 실려가서 난리가 났으며, 동화와 채색 하청사들은 건담은 [[도라에몽]]보다 선은 10배는 많아 힘들어서 안 한다고 다 거절해서 하청사를 하나하나 찾아가서 울면서 부탁해야 했으며, 애니메이터와 제작진행은 계속 도망가서 남은 사람의 일 부담은 더 커지고[* 근성 있게 계속 남아있어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이타노 이치로]]였다고 한다.], 스튜디오에는 도둑이 수시로 들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한다. 우에다 자신도 이 작품이 명작으로 완성된 건 기적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토미노는 막 입사하고 이런 사태를 겪었는데도 끝까지 회사에 남은 우에다의 근성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기동전사 건담이란 작품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을 해 이런 작품을 만드는 연출가가 되겠다는 목표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토미노 요시유키에게 연출가를 시켜달라고 했는데 토미노가 "연출을 하려면 제작진행을 최소 2년은 해야한다. [[전설거신 이데온]]까지 제작진행을 하자."라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기동전사 건담 극장판 기획이 통과되었는데 TV판 때 관여한 제작진행이 다 그만두어 선라이즈에서 우에다에게 제작진행의 리더를 해달라고 부탁했고 우에다는 이데온의 제작진행을 중도 포기하고 건담 극장판을 하기로 했다. '극장판 기동전사 건담 2 애전사'에서는 어시스트 프로듀서를 맡았고 '극장판 기동전사 건담 3 만남의 우주'에서는 이례적으로 20대의 나이에 프로듀서의 자리에 올랐다. 이때 "나는 연출가보다 프로듀서가 적성에 맞는다."라는 생각이 들어 프로듀서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한다. 이후 [[시티헌터]]의 프로듀서를 맡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으며 이때의 공적으로 1990년대 30대의 나이에 선라이즈의 임원 자리에 오른다. 이례적인 승진이라 주변에서는 '시티헌터 인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시티헌터의 핵심 인물이고 애정도 깊어 선라이즈 퇴사 이후에도 시티헌터의 스핀오프 작품 [[엔젤하트(만화)/애니메이션|엔젤하트]]도 프로듀스했고 2019년부터 다시 시작된 선라이즈의 시티헌터 극장판에도 기획 협력으로 참여한다. 2019년부터 시티헌터 애니메이션이 부활한 건 스와 미치히코(諏訪道彦) 프로듀서와 우에다 마스오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관계자를 설득한 덕이라고 한다. 자신에게 있어 [[건담 시리즈]]는 첫 작품이 가장 완성도가 높으며 이후의 후속작은 사족이라는 생각과 이대로 변혁이 없으면 시리즈가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극장판 건담 시리즈가 성공하고 [[야마우라 에이지]] 프로듀서와 함께 "건담은 다시는 만들지 않는다! 회사가 망할 때나 만들 것이다!"라고 했는데 정말로 회사 사정이 안 좋아져서 [[기동전사 Z건담]]이 나오고 몇 년이나 우주세기 건담을 계속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https://web.archive.org/web/20080120195831/http://playlog.jp/pegasus/blog/2006-09-20|#]] 그리고 자신이 직접 프로듀스한 [[기동전사 V건담]]에도 실망감이 있어 1990년대부터 [[우주세기]] 건담 시리즈를 그만두고 '건담 빅뱅 프로젝트'라는 기획을 세웠다. 이때 파격적인 내용의 [[헤이세이 건담]] 3부작([[기동무투전 G건담]], [[신기동전기 건담 W]], [[기동신세기 건담 X]][* 다만 X는 기획만 관여했다.])을 프로듀스했다. 그리고 토미노와 함께 [[∀건담]]을 기획했으며 기존의 건담의 디자인을 파괴하고 싶다며 [[시드 미드]]에게 디자인을 맡겨[* 프로듀서 은퇴 후 시드 미드 전시전을 기획하기도 했는데 이 전시전이 열리고 얼마 뒤 시드 미드는 사망했다.]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이 4작품은 발표 당시에는 상업적인 성과가 기대 이하였으며[* 우에다 말로는 적자는 아니었다고 한다. 애초에 건담 시리즈는 아무리 망해도 적자를 본 적은 없었다고 한다. 다만 반다이가 원하는 기준엔 미치지 못했다고 한다.] 팬들에게 많은 욕을 먹었고 스폰서인 [[반다이]]에서도 우에다를 좋게 보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4작품은 새로운 시도 덕에 훗날 재조명을 받았다.[* 건담의 아버지 토미노는 훗날 이 4작품 중 G, W, ∀ 3개를 "새로운 시도를 했다."라며 호평했다.] 2000년에 [[이누야샤/애니메이션|이누야샤]]의 기획을 마지막으로 선라이즈를 퇴사하고 프리랜서 프로듀서로 활동했다. 이누야샤의 기획에 관여했다가 그만둬서 퇴사 뒤로도 선라이즈에서 이누야샤 극장판의 일을 맡겨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일본의 애니메이션 스폰서는 만드는 사람의 능력은 보지 않고 회사 간판만 보고 투자한다는 한계를 보았다고 한다. 실제로 프리랜서 시기에는 작품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때 [[소니]]의 [[애니플렉스]]에서 자문의원으로 와 달라는 제안을 받았고 이를 받아들여 애니플렉스의 총괄 프로듀서가 되었다. 2010년 이후의 애니플렉스의 많은 작품의 기획에 관여했다. 선라이즈에서는 "왜 경쟁사로 가는가."라고 하면서 욕을 많이 했다고 한다. 토미노도 "너 왜 날 버리고 딴 데로 가냐!" 하고 화를 냈다고 한다. 그래도 떠난 건 선라이즈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할 수 없었고, 경쟁사가 있어야 선라이즈도 더 열심히 할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한다. 애니플렉스는 당초 원작이 있는 인기 작품만 프로듀스하려고 했으나 우에다 마스오가 "그런 것만 해서는 회사에 미래가 없다. 리스크가 커도 저작권을 회사가 가지는 새로운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을 해야 한다."라고 계속 설득해서 오리지널 작품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자신이 월권으로 기획을 통과시킨 작품은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는 아직 모른다]],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알드노아. 제로]]라고 한다. 3 작품 모두 다른 사람들은 이거 망한다고 반대했었다고 한다. [[아이돌 마스터/애니메이션|아이돌 마스터 애니메이션]]도 당시 게임 [[아이돌 마스터 2]] 논란으로 팬층이 이탈해 아무도 애니화 안 하겠다고 한 걸 우에다가 하자고 했다고 한다. [[소드 아트 온라인/애니메이션|소드 아트 온라인 시리즈]]도 우에다가 추진했다. 자신에게 그 정도의 권한을 줬기 때문에 애니플렉스로 이적한 것이라고 한다. [[진격의 거인/애니메이션|진격의 거인]]도 무조건 해야한다고 기획을 추진했는데 그건 [[나카타케 테츠야]]가 채갔다고 한다. 애니플렉스가 자체 제작사 [[A-1 Pictures]]를 설립한 뒤 우에다에게 회사를 키워 달라고 부탁해 A-1의 현장 프로듀서로 복귀한다. 본인은 이때 이미 고령의 나이였고 현장에 복귀하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후배를 키워달라는 부탁에 동의해 현장 복귀 했다고 한다.[* 대신 직함은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로 크레딧되어 나온다.] A-1의 경영 방침인 "연출과 작화와 같은 분야는 하청사와 프리랜서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지만 [[프로듀서]]와 [[제작진행]]은 최고급 인력을 쓴다.", "제작진행이 과로로 고생하지 않게 제작진행을 넉넉하게 고용한다.", "최고의 프로듀스와 제작진행으로 다른 스태프가 고생하지 않도록 최고의 편의를 보장해 작품의 질을 높인다."라는 경영 방침은 우에다가 제안했다고 한다. 다만 실제로는 제작진행이 자살하는 사건도 발생했고, 스케줄이 꼬인 작품도 발생해 그의 뜻 그대로 경영되지는 않은 것 같다. 애니메이션 외의 애니플렉스의 스폰서 사업에도 관여했으며 [[Fate/Grand Order]]에 투자를 하라는 지시를 내린 건 자신이라고 한다. 이런 많은 공적으로 2015년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의 SVP, 2016년 애니플렉스의 회장 자리까지 올랐으나 경영은 자신과 맞지 않는다며 2018년 그만두었다. 2018년에는 '스카이폴'이라는 기획, 프로듀스 전문 회사의 대표이사로 취임해 후진 양성에 전념한다. 이제 자신이 현장에 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한다. 2023년 'NAFCA' 라는 애니메이션 업계의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를 성립했다. 기존의 애니메이터 조합, 단체들이 임금 협상에만 중점을 두고 돌아가던 거에서 탈피해 다방면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는 집단이라고 하며, 성우 또한 조합원에 포함된다는 점이 기존 단체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 일본 정부가 애니메이터에 불리한 정책만 내놓는다고 규탄했으며 앞으로도 이런 일이 반복되면 아예 다른 나라로 일본의 애니메이션 감독, 애니메이터 데리고 [[엑소더스]]하겠다고 선언했다. 세계엔 일본의 애니메이터를 데려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애니메이터는 언어와 공간의 제약이 적은 일이라 옮겨버리면 그만이라고. 옮기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적극 지원하겠다고 한다. 물론 정부 정책이 개선되어서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한다고도 덧붙였다. 또한 신인 애니메이터가 기초가 안 되어서 오히려 선배 애니메이터와 작화감독에게 방해만 되는 일이 늘어나는데 시간이 없어 그들을 가르칠 수 없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며 애니메이터의 실력을 검증하는 공인 시험을 만들어서 자격증으로 검증받은 사람에겐 좀 더 특혜를 주는 것을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키타오 마사루]], [[니시이 테루미]], [[야마모토 유타카]]도 이 계획에 동의한다고 한다. 다만 우에다의 구상에 대해 "그림을 잘 그리냐 못 그리냐를 대체 누가, 어떻게 판단한단 말인가?"라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업계인들도 있다. [[아라이 준]]은 "임금부터 올려놓고 시험을 만들어야지 유료 검정 시험부터 만들면 뭐가 개선되냐?" 라고 했고 [[야마우치 히데코]]는 "난 이 시험이 생겨도 안 받겠다." 라고 했으며 [[코지마 케이스케]]는 "시험의 필요성은 동의하지만 왜 이 시험 디지털 작화 시험은 없고 종이 작화 시험만 있는가?[* 이유는 "각 회사에서 쓰는 프로그램이 전부 다르므로 특정 프로그램 하나로 검정할 수 없다." 라고 하는데 대부분의 디지털 작화가 [[CLIP STUDIO PAINT]]로 통일되어 가는 중이라 이해가 안 된다는 소리가 많다. 디지털 작화에 부정적인 [[키타오 마사루]]와 [[니시이 테루미]]가 기획에 참가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라고 반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